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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대구 골목경제><6>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나만의 신발을 구입할 수 있는 곳, '향촌동 수제화골목'

기사승인 2016.12.14  16: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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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최고의 수제화 골목...2대째 이어지는 가게도 나와

“몸의 모양이 사람마다 다 다르듯 발도 모양이 모두 달라요. 내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신는다는 건 딱 맞는 옷을 입고 외출하는 것만큼 설레는 일이에요.”

대구 중구 향촌동 수제화골목에는 자신의 발에 딱 맞는 맞춤 수제화를 구입할 수 있다. (사진/향촌동 수제화골목 전경, 김지은 기자)

산업화와 대량생산이 당연시된 현대 속에서 아직도 사람들의 발을 하나하나 재고 만져본 후 가죽을 손으로 당기고 굵고 억센 바늘로 가죽에다 바느질을 하며 그들에게 딱 맞는 신발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대구 중구 향촌동 수제화골목은 항상 수제화를 만드는 망치질 소리와 가죽냄새가 가득하다.

◆‘남자구두는 대구, 여자구두는 서울’ 수제화의 천국

대구 중구 향촌동 수제화골목에는 자신의 발에 딱 맞는 맞춤 수제화를 구입할 수 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소중한 사람에게 하는 선물, 나에게 딱 맞는 신발을 사려는 이들, 장애를 가져 기성화를 못 신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이유로 맞춤 수제화를 찾는다.

수경제화 이보라(49·여) 직원은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도 많은 수제화골목들이 있지만 그곳에서는 대부분 공장 형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일 뿐 이렇게 직접 재서 개별적으로 발에 맞춰주는 것은 대구뿐이라 전국에서 찾아오는 고객도 있다”고 말했다.

수제화의 가장 큰 장점은 내 발에 딱 맞춰서 신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불편한 곳이 있다면 그 부분의 수정·보완이 가능하고, 디자인을 변경하고 싶으면 나만의 디자인으로 변경도 가능하다.

수제화를 맞추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신미옥(57·여) 씨는 “내 발에 맞는 신발을 한 번 신어보면 왜 수제화를 신는지 알게 된다”며 “나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거처럼 편하고 하나뿐인 내 신발이기 때문에 설렘도 있을뿐더러 더욱 각별해진다”고 말했다.

대구의 수제화는 1960~70년대 전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했다. 첫 시작은 향촌동이 아니라 화전동이었다. 70년대 이전 대구 중구의 화전동에 있던 자유극장 주변에 수제화 기능공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수제화골목을 지키고 있는 명인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기술을 배웠다.

대구의 수제화는 1960~70년대 전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했다. 첫 시작은 향촌동이 아니라 화전동이었다. (사진/한지현 기자)

박유복(85) 어르신은 “당시 전국에서도 유명했던 ‘분홍신’과 ‘칠성구두’ 등이 이곳에 있었다”며 “그 당시에는 신발 하나만 만들면 두둑한 돈다발을 벌 수 있다고 할 정도여서 수제화 기능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가득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70년대를 넘어오면서 수제화 골목은 향촌동으로 옮겨졌다. 1960년대 향촌동은 다방과 술집이 거리를 가득 채웠으며 대구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이에 이 골목은 항상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러다 70년대 대구의 상권이 향촌동에서 동성로로 옮겨지면서 화전동에 있던 수제화 기능공과 피혁상들이 이곳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시작된 향촌동 수제화골목에는 한 때 300m 남짓한 거리에 130여개의 수제화 공장과 피혁점이 들어서기도 했다.

박유복(85) 어르신은 “예전 수제화는 자식이 첫 월급을 타면 부모에게 빨간 내복을 선물 했던 것처럼, 대학과 직장에 들어갈 때나 결혼할 때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대표적인 선물이었다”며 “그 당시 ‘남자구두는 대구, 여자구두는 서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구 수제화는 전국 최고였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수제화 기술

1990년대 말 유통구조가 변화하고 대량생산의 값싼 중국 제품들이 들어오면서 수제화 산업은 침체기를 맞게 됐다. 특히 2000년대 대형마트와 홈쇼핑 등의 유통업이 넓어지면서 수제화 업체들은 우르르 무너졌다.

또한 원재료 비는 계속해서 급등하고 수제화를 찾는 이들은 적어지면서 수제화 기술을 배우는 시간과 노동의 고단함에 비해 턱도 없이 적은 임금으로 수제화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갔다.

실제 맞춤 수제화는 한 켤레를 만드는데 약 1주일 정도가 소요된다. 먼저 발의 모양과 치수를 기록하고 그에 맞는 라스트(신발 틀)를 찾아 모양에 맞게 깎는다. 그런 후에는 디자인에 들어갈 패턴을 만들고 가죽을 재단한다. 이어 가죽을 재봉질(갑피)하고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에 굽을 부착(저부)한다. 이후 마무리 작업을 거치면 하나의 수제화가 완성되는데 신어본 후 딱 맞지 않을 때에는 다시 수정하는 작업도 이뤄진다.

맞춤 수제화는 한 켤레를 만드는데 치수 기록, 재단, 라스트 깎기, 갑피, 저부 등의 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약 1주일 정도가 소요된다. (사진/종로제화의 수제화 작업 모습, 한지현 기자)

약 50년간 수제화를 만들어온 백수용 장인에 이어 2대째 ‘종로제화’를 운영하고 있는 백슬기(33) 대표는 “수제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고 이 모든 작업을 손으로 직접 하기 때문에 더 큰 정성이 필요하다”며 “지금 이 골목에도 많은 매장들 중 실제로 수제화를 만드는 곳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들이 계속해서 수제화를 만드는 이유는 수제화를 꼭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백 대표는 “예전에 한 어머니가 오셨는데 그 어머니의 경우 왼쪽 엄지발가락이 약 6cm정도로 부어있었다”라며 “뼈가 튀어나와 평생을 그렇게 사셔서 고칠 수도 없었기에 오른쪽 발에는 본인의 사이즈인 245mm를 신으시고 왼발은 270mm를 신으셨다. 그분에게 맞는 신발을 만들어드렸는데 자기 두 발에 맞는 신발은 처음 신는다며 너무나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대구수제화협회는 수제화골목에 활성화를 위해 지난 2013년 공동브랜드 개발과 공등판매장 운영을 목표로 하는 수제화골목 공동브랜드 ‘편아지오’를 만들어 같은 해 9월 오픈했다.

또한 2014년부터 올해까지 대구 수제화를 널리 알리기 위한 대구 수제화골목 축제 ‘빨간구두 이야기’도 진행됐다. 축제는 향촌동 수제화골목에 무대를 마련하고 ‘신데렐라를 찾아라’, ‘초대가수 공연’, ‘불우이웃돕기 즉석경매’, ‘시민참여게임(구두닦이, 못 박기 대회)’ 등의 시민과 함께하는 행사로 추진됐다.

향촌동 수제화골목 입구 (사진/한지현 기자)

하지만 이 축제마저도 내년부터는 볼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대구 중구청 전략경영실 이난주 담당은 “수제화골목 축제는 2014년 국토부의 공모사업인 ‘도시활력증진지역개발사업’에 선정돼 진행했던 축제로, 올해 3년 사업이 끝났다”며 “수제화골목의 활성화를 위한 대안은 계속해서 추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종로제화 백 대표는 “결국 수제화라는 것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인정을 받고 귀해질 것이라 생각한다”며 “현재 이곳에도 직접 수제화 만드는 기술을 이어 받아 명맥을 이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줄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많이 들어와서 이 골목의 명맥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지은 기자 kje@deconom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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