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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경제의 터전, 전통시장><5>미제물건으로 흥했던 '봉덕시장', 현대화된 '봉덕신시장'

기사승인 2016.10.08  08: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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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대구 4대 시장이던 봉덕시장은 겨우 명맥만 유지, 봉덕신시장과 함께 활성화 방안 모색해야

지난 5일 오후 2시 대구 남구 봉덕시장. 70~80년대 사람들로 가득했다는 봉덕시장 안에 위치한 작은 골목은 이제 옛 시장의 활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어둡고 낡아있었다. 유난히 어둑어둑했던 이 골목에서 문을 연 가게는 단 두 곳뿐. 그 중 하나인 영화침구점 안에서는 희미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를 따라간 가게 안에는 낡은 재봉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는 한 할머니만이 돋보기를 쓴 채 손바느질로 베갯잇을 꿰매고 있었다. 30년 넘게 봉덕시장에서 손바느질을 해온 서효정(78)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지금도 한번씩 사람들이 가득했던 봉덕시장이 떠오를 때가 있다”며 “나이가 80이 다 돼 가지만 이 자리를 지키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라고 말 끝을 흐렸다.

대구시 남구 봉덕동에 위치한 봉덕시장은 1945년 광복과 1950년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시장으로, 아직까지도 시장 곳곳에는 미제 물건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대구시 남구 봉덕동에 위치한 봉덕시장은 1945년 광복과 1950년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시장으로, 아직까지도 시장 곳곳에는 미제 물건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사진/김지은 기자 kje@deconomic.co.kr)

◆한국전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봉덕시장’

서효정 어르신에게 봉덕시장은 평생의 인생이 담긴 삶의 터전이다. 서 어르신은 1938년 대구 남구 봉덕동에서 태어났다. 어르신이 12살이 되던 해 터진 한국전쟁은 동네를 모두 앗아가 버렸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피해있었던 학교에 군부대 차가 오더니 나를 포함한 여자학생들을 차에 태웠어. 그러고 옛날 미군부대가 있었던 지금의 대구중학교가 있는 곳으로 갔지. 내리고 보니 피를 뒤집어쓴 병사들이 운동장을 가득 채우고 있더라고...”

전쟁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서 어르신은 계속 말을 이었다.

“북한군이 낙동강을 넘어와 사상자가 많이 생겼어. 그리고 대구역에 포탄이 떨어졌다는 거야. 부상병이 병원 대신 미군부대나 학교에서 급하게 치료를 받았어.”

그는 어린 나이에 병사들의 피 묻은 옷을 거둬 직접 손으로 빨래하는 일을 했다. 전쟁의 잔임함을 그대로 겪었던 어르신은 팔달교와 경산까지 피난을 떠났다가 휴전이 선포된 뒤 다시 봉덕동으로 돌아와 새롭게 터전을 잡았다.

전쟁을 온몸으로 기억하는 서 어르신이 봉덕시장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배운 바느질 때문이다. 바느질 솜씨로 동네에서 유명했다는 어머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능 때문인지 곧 잘 따라한 게 평생 직업이 됐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효정아 너는 나중에 바느질 하지 말아라’고 했어. 한 번 하기 시작하면 평생 바느질로 먹고 살아야 한다고… 살다보니 그게 마음처럼 되나. 결국 어머니처럼 바느질로 자식들 다 키우고 지금까지 먹고 살았지...”

봉덕동에서 집안일을 하며 소일거리로 해왔던 바느질이 본격적인 ‘업’이 된 것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1980년대 후반이다. 쉰을 앞둔 서 어르신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홀로 봉덕시장에 침구점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익힌 손바느질로 이불을 만들어 판매했다. 서 어르신처럼 1980년대 후반 봉덕시장은 저마다의 이유로 가게를 열고 생업을 이어온 상인들이 많았다.

“그때 봉덕시장은 미군과 미군 가족들, 미제 물건을 사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등으로 매일 매일이 시끌벅적했어. 어떤 날은 한국 사람들보다 미국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할 정도였지.”

봉덕신시장은 2006년에 등록된 시장으로, 지속적인 현대화 사업으로 시장 전체에 설치된 아케이드와 넓은 공영주차장, 야외상설공연장 등이 조성돼있다.

봉덕시장 근처에는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 공군본부가 주둔했던 미군부대 ‘캠프 워커’가 있다. 캠프 워커는 1920년대 일본군에 의해 건설돼 경비행장, 탄약고, 훈련장 등으로 쓰였던 기지로, 군대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부터는 미국 육군이 주둔했다.

당시 봉덕시장은 부대에서 흘러온 워카(군화), 담요, 재봉틀, 프라이팬부터 씨레이션(미군 전투식량)까지 온갖 구제품과 군사보급품들이 가득했다. 이에 다른 시장에 비해 훨씬 빠르게 활기를 찾아 70~80년대 최고의 호황을 누리며 대구 4대 시장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때는 뭐 영어를 배운 사람이 있나, 미군이 하는 말은 못 알아들어도 그냥 ‘킹사이즈? 스몰사이즈?’만으로 다 장사하고 그랬어. 가끔씩 여기 앉아 있다 보면 그때 들리던 서툰 발음의 ‘킹사이즈 스몰사이즈’ 목소리가 생각이 나.”

◆역사를 간직한 ‘봉덕시장’과 현대적인 ‘봉덕신시장’

1972년에 정식 허가를 받은 봉덕시장은 대형마트와 슈퍼마켓 등이 들어선 90년도부터 하락세에 접어들어 현재는 59개의 점포만 등록돼있는 상태다.

오래된 역사를 가진 봉덕시장이 시장의 기능을 잃어가자 남구청은 2005년 시장을 다시 살리기 위해 현대화사업 등의 사업을 실시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추진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봉덕신시장’이다.

대구시 남구청 시장경제과 조정수 주무관은 “봉덕시장은 아주 오래된 시장으로 주택가 골목에서 여러 사람들이 세를 내고 자리를 잡아 운영된 시장이라 협약이 원활하지 못했다”며 “주택가에 있는 봉덕시장 대신 큰 길과 붙어있던 상가들을 모아 현대화 사업을 실시하고 만들어진 게 봉덕신시장이다”고 설명했다.

봉덕신시장은 2006년에 등록된 시장으로, 지속적인 현대화 사업으로 시장 전체에 설치된 아케이드와 넓은 공영주차장, 야외상설공연장 등이 조성돼있다. 이를 바탕으로 봉덕시장은 특화된 상품을 개발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행사와 공연을 수시로 열었다. 덕분에 지난 2013년 중소기업청 시장경영진흥원이 발표한 ‘전국 전통시장 활성화 수준 평가’에서 최상위 등급인 A등급을 받기도 했다.

오래된 역사를 가진 봉덕시장이 시장의 기능을 잃어가자 남구청은 2005년 시장을 다시 살리기 위해 현대화사업 등의 사업을 실시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추진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봉덕신시장’이다.

247개의 점포가 있는 봉덕신시장은 청과와 채소, 양곡, 농축산, 수산물, 반찬, 패션 등 없는 게 없을 만큼 다양한 제품을 파는 시장이다. 봉덕신시장은 그 중에서도 돼지국밥과 강정‧한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봉덕신시장 상가연합회 서용조 회장은 “우리 시장의 돼지국밥은 옛날부터 다른 국밥집들과는 다르게 돼지머리의 고기를 사용했다”며 “이에 더 깊은 맛을 내는 육수와 담백한 고기가 주는 국밥의 맛이 입소문을 타면서 유명해졌다”고 말했다.

실제 봉덕신시장에는 돼지국밥집으로 채워진 골목이 있다. 이 골목에서는 돼지머리고기가 들어간 따뜻한 국밥을 항상 판매한다. 또한 이 시장에서 직접 만드는 한과와 강정은 매년 명절이 되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을 만큼 알려져 있다.

봉덕신시장을 찾은 박승훈(62) 씨는 “봉덕신시장에 오면 예전 생각이 나서 꼭 국밥을 먹고 간다”며 “젊었을 때는 옆에 있는 봉덕시장에 와서 미제 물건 많이 샀었는데 이제는 봉덕시장이 거의 다 죽어서 아쉬운 점도 많다”고 덧붙였다.

특색을 갖춘 봉덕신시장에 반해 봉덕시장은 노후된 주택가 골목에서 겨우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구전통시장진흥재단 장흥섭 원장은 “현대화 사업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봉덕신시장에 비해 봉덕시장은 오랜 역사만 간직한 채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라며 “봉덕시장은 한국전쟁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시장인 만큼 새로운 활성화 방안을 찾아 시장의 역사를 유지해야 하며, 봉덕신시장 또한 국밥골목이나 구제골목 등을 특성화해 재미있는 관광거리로 만들어 활성화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전했다.

봉덕시장 영화침구점의 서효정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이 골목에는 봉덕신시장을 찾은 몇몇의 사람들이 골목 안으로 들어와 낡은 건물들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나가기만 했다. 사람의 발길이 없었다.

7일 서효정 어르신이 여전히 한적한 봉덕시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김지은 기자 kje@deconomic.co.kr)

“이 앞집이랑 나는 그래도 매일 가게를 여는데 보면 한 달 동안 이 앞집에서 옷 한 벌 나간 적이 없어. 장사하려고 나오는 게 아니라 그냥 적적하니 심심하니까 나와서 가게에서 바느질이나 하고 옛날 생각이나 떠올리고 그러는 거지.”

김지은 기자·노경석 기자 kje@deconom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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