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흥왕이 마을 분쟁 해결을 위해 울진까지 급히 달려온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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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신라비. 현재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전시관에 전시돼있다. 강원도민일보 제공 |
신라 법흥왕 524년 신라의 변방 울진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경주 중앙군까지 동원되면서 민요(民擾)는 겨우 평정되었다. 왕이 직접 심문에 나서 소란에 가담한 자들을 벌하고 소까지 잡아 민심을 안정시켰다.
무얼까, 왕이 동해의 국경까지 온 이유는? 비문의 내용으로 봐서 ‘소요의 성격’에 대해 크게 눈에 띄는 점은 없다. 그냥 일상적인 주민 분쟁이다.
그렇다면 법흥왕의 행차는 사건의 내용보다 ‘울진’이라는 지정학적 특수성이 더 큰 작용을 한 것 같다. 또 법흥왕 대 행해졌던 정책의 순례(巡禮)나 현장 확인의 성격도 있는 것 같다.
무엇일까. 신라 궁문을 박차고 동해안 자락으로 말을 몰게 한 울진의 그 긴박했던 상황은. 그 해답을 찾아 울진 봉평리 신라비문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88년 죽변면 봉평리의 논에서 한 바위가 발견됐다. 평범한 돌인줄 알았던 농부는 포클레인으로 들어 올려 길가에 버렸다. 그냥 자연석으로 묻혀질 뻔한 이 비석은 한 향토사학자에 의해 양지(陽地)로 올라오게 됐다.
높이 204cm. 10행에 총 398자가 음각돼있는 이 비문엔 법흥왕 11년, 울진지역의 거벌모라(居伐牟羅)와 남미지(男彌只)라는 곳에서 발생했던 모종의 소요사건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다. 법흥왕과 6부 대신 13명은 계엄령에 버금가는 조치를 취하고, 대인(大人)을 파견해 지방관 및 거벌모라, 남미지 지역의 토호에게 형을 집행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울진 봉평신라비는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학자들이 비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율령과 관련된 내용이다. 학자들은 ‘삼국사기에 율령의 반포와 관련된 기록이 보이는 데 봉평비는 바로 이 율령이 현장에서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라고 말한다.
. 6세기 동해안에 왕과 6부의 장(長)들이 친정(親征)에 나설 정도 긴급한 사안은 무었이었을까.
봉평 신라비가 있던 동해안은 본래 실직국(悉直國)이 터를 잡았던 지역이다. 삼척, 동해안을 근거로 성장했던 실직국은 일찍부터 신라의 세력에 편입되었다. 파사왕조에 ‘102년에 실직군주가 항복해왔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고 지증왕대에는 ‘주군현을 정리할 때 실직주를 두어 이사부를 군주(軍主)로 삼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학자들은 “신라가 실직국을 차지하면 함흥까지 세력을 펼칠 수 있고, 반대로 이 지역을 내주면 울진, 영덕까지 고구려의 힘이 뻗쳐 신라의 국경이 동해 남부지역으로 쪼그라들게 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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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 봉평 신라비전시관 전경. 경북도 제공 |
신라 중앙 정부가 울진에 이토록 집착했던 이유, 그 배경엔 5세기 고구려와 벌였던 전쟁 중에 입었던 트라우마가 작용하고 있었다.
주지하듯 장수왕은 대대적인 남하(南下) 정책을 펴 한반도 남부를 압박했던 고구려의 정복군주였다. 이 시기 충남 아산만에서 경북 흥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가 고구려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런 고구려-신라의 군사 핫 포인트에서 벌어진 소란에 신라 정부가 과민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삼척이 후에 황초령까지 이르는 신라의 대 고구려북진정책 기지였다면 울진은 경주와 삼척을 연결하는 군사 거점이었던 것이다.
올해 초 울진 출신 원로 역사학자인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봉평리신라비를 포항 중성리, 냉수리 비와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주장을 제기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노 교수는 1월 ‘포항 신라고비와 신라사 한국 고대의 금석문‘ 주제 기조강연에서 울진 봉평리신라비, 포항 중성리비와 냉수리비 등 동해안 지역 3개 신라 고대 비(碑)의 역사적 가치를 역설했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