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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듬뿍 추억 가득, 대구 전통시장] 대구시 동구 송라시장

기사승인 2023.01.09  15:2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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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80년대 송라시장 일대는 전국 최대 명태 가공골목

신천동 일대는 1960~80년대 전국 최대 북어포 골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송라시장은 이 명태골목의 후광을 업고 창설 되었다. 한상갑 기자

대구시 신천동 송라시장의 내력을 추적하다 보면 맨 끝에서 만나는 것이 있다. 바로 국민 생선인 명태다.

내륙 도시인 대구에서, 그것도 수산물 집산지도 아닌 외곽 골목시장에서 무슨 명태 흔적이 있을까마는 이력(履歷)을 따지고 들어가면 저절로 수긍이 간다. 신천동 송라시장 일대가 1970~80년대 전국 최대 명태 가공골목이었기 때문이다.

명태 중 제사상에 올리는 ‘황태포’가 이 골목의 주력 상품이었는데, 전성기 때 신천, 경부선 철도변이나 송라시장 골목엔 명태 가공업체 100여 곳이 성업을 했다고 한다. 한창 때 한 집에서 500마리 이상 가공을 했다고 하니 하루 5만 마리 이상 전국으로 팔려나간 셈이다.

1963년 개시(開市)한 송라시장은 바로 이 명태 가공업체의 후광을 업고 출발했다. 하루 수만 마리가 거래됐으니 골목은 거래상인, 리어카, 화물차들로 북적거렸고 이들의 숙식과 상거래 편의를 위한 시장은 필수였다.

세상을 ‘크게(太) 밝히는(明) 생선’이 신천동 송라시장에 깃든 사연을 추적해 보자.

 

◆6·25전쟁 직후 신천 일대에 피난민촌 형성=송라시장 취재에 나서며 먼저 드는 의문이 있다. 바로 명칭에 관한 것이다. ‘송라’(松羅)하면 ‘소나무가 비단처럼 펼쳐져 있다’는 뜻인데 주변에 송림과 관련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현재 신천변, 시장 일대가 옛날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이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지역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정영진 씨는 송라는 ‘송라못’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저서 ‘대구 이야기’에서 송라아파트, 송라시장 일대에 ‘소라못’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못의 모양이 소라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못 이름이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송라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18세기 발간한 ‘대구읍지’에도 송라못에 대한 지도가 나오고 둘레, 수심 등 상세 한 설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를 정설로 봐도 무방하다고 하겠다.(송라못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다면 두 개의 설(說)이 모두 만족하는 조합이긴 하다.)

신천동에 시장이 들어서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6·25 한국전쟁이었다. 전쟁 직후 신천일대는 피란민들의 움막과 밥솥이 온 강변을 덮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신천동 경부선 철도 일대에 피난민촌을 형성했는데, 호구지책이 절실했던 피란민들에게 명태 가공 일감이 주어진 것이다.

생선 가공 일은 어떻게 보면 피난민들에게 최적의 일감이었을 것이다. 적당한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는 데다 작업 중 생기는 부산물로는 배를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송라시장 근처에 피난민들 대규모 명태골목 형성=피난민들의 명태 가공 기원에 대해 동구청의 홈페이지에 ‘한국전쟁 이후 동해 항구에서 명태를 받아서 껍질을 벗겨 인근 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나온다.

유추해보면 산지에서 생태를 바로 받아서 일부는 동태나 생태로 팔고 일부는 건조 작업을 거친 후 황태포로 납품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신천동 일대에 명태골목, 명태촌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들어와 피난민들이 자리를 잡고 사회가 안정되자 번거롭고 위생에 문제가 많던 생태, 동태 취급이 줄어들고 북어포로 특화한 것으로 보인다.

취재 중 만난 한 어르신은 “1970년대에 들어와 생태, 동태 판매는 주변 시장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이곳 명태골목에서는 황태포, 북어포만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방식으로 변했다”고 전했다.

주로 서문시장이나 칠성시장 도매상들에게 반건조 상태의 명태를 받아서 이를 펴서 포로 제작한 후 납품하는 방식이었다.

전국 최대 북어포 골목이었던 송라시장 일대 명성은 어느 순간 빛이 바래게 되는데 그 계기는 뜻밖에도 ‘지구온난화’였다. 기후, 환경문제가 신천동 일대 경제, 유통 지도를 바꾼 것이다.

최근 들어 한류(寒流) 어종인 명태가 러시아 쪽으로 북상하면서 한국 연근에서 명태 어획량이 급격히 감소했기 때문이다.

물론 유통시장 개방, 대형마트 등장으로 인한 전통시장의 쇠락 같은 외부적 요인도 함께 작용했다.

송라시장 메인 출입구 모습.

◆규모는 작지만 도심 속 필수 점포, 아이템 갖춰=이제 오늘의 주인공 송라시장으로 들어가보자. 송라시장이 문을 연 것은 1963년도. 앞서 언급한 대로 시장 일대의 명태골목이 가장 활기를 띠었을 때다.

처음엔 전국에서 물려 몰려드는 명태 상인들을 위한 식당, 술집들이 들어섰다가 점차 주변 주택가의 배후 상권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골목시장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가건물, 임시 장옥(場屋)형태로 들어선 시장은 1965년 신천교가 들어서며 상권의 날개를 달게 되었다. 다리의 개통으로 대구 도심과 동구의 경제권이 가까워졌고 유동인구의 급증으로 상거래는 활발해졌다.

이런 송라시장의 호황기는 명태거리가 활발하던 1990년대까지 전성기를 지속하다가 2000년대 들어 앞서 언급한대로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동구청에서는 2006년 송라시장을 전통시장으로 정식 등록하고 대대적인 현대화 작업을 벌였다. 현재의 아케이드와 상점 입간판, 시설물, 조명시설, CCTV 등이 그때 갖춰졌다.

현재 송라시장엔 임차점포 76곳과 노점 5곳이 영업 중이다. 점포들은 대부분 야채, 과일, 정육점 등 식품, 반찬거리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떡집, 방앗간 같은 근린생활 업종이 혼재되어 있다.

통로 전체 길이가 100m 되지 않는 골목시장이지만 많은 셀럽 점포를 거느리고 있다.

경단, 유과, 망경떡, 모시떡, 꿀송편을 파는 N떡집, 볶음족발, 꼬들족발, 돼지국밥과 보쌈·쟁반국수를 함께 파는 C족발집, 30가지 반찬으로 뷔페를 차려내는 30년 전통의 J뷔페, 통닭을 옛날 방식으로 튀겨내는 M식당 등도 골목에서 나름 두터운 단골 층을 형성하고 있다.

시장에서 만난 한 주부는 “송라시장은 동네 시장의 아기자기한 특성이 잘 녹아 있어 구석구석에서 레트로 감성을 느낄 수 있다”며 “규모는 작지만 채소, 생선, 육류, 반찬 등 식료품부터 방앗간, 잡화, 쌀집, 혼수방, 빵집까지 모두 갖춘 속이 꽉 찬 시장”이라고 말했다.

 

◆송라시장에서 뭐 하고 놀까 뭘 먹을까

송라시장은 6.25전쟁 직후 피난민들이 시장 근처에 명태가공골목을 형성하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성기 때는 하루 5만 마리가 전국으로 팔려나갈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지금은 10여 곳만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히고 있다. 신천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시장과 바로 연결된다.

▶주소=동구 동부로 5길 21-3.

▶영업시간=오전 7시~오후 10시.

▶교통=신천역 2번 출구, 101번, 425번, 651번, 동구2번, 북구3번.

▶특징=신천LH 파크, 신천역 더뷰파크, 신천역 센트럴리버파크 등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든든한 배후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맛집=전통떡, 옛날통닭, 족발·보쌈, 한식뷔페.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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