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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피플] ‘대구독립운동기념관 추진위’ 우대현 위원장

기사승인 2022.06.03  15: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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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광복 80주년 행사는 ‘대구독립운동기념관’에서 열려야죠

‘대구독립운동기념관 추진위’ 우대현 위원장이 그의 사무실에서 대구독립운동기념관 추진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권혁만 독자 제공

“서울 서대문형무소는 국가역사관으로 지정돼 정부에서 예산을 들여 현창(顯彰) 사업을 하고 있는데 희생자가 더 많았던 대구형무소는 추모 사업은커녕 건물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형평성 차원에서라도 빨리 대구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해 정신을 계승해야 합니다.”

항일, 독립운동사를 논할 때 대구는 항상 그 중심에 선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로서 상징성 외에도 출신지역별 독립 유공자 현황에서도 그 수(數)가 타지역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2015년 통계로 경상도(대구 포함)의 독립유공자는 3,170명으로 경기도 1,085 서울에 371명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대구는 ‘독립운동의 거점도시’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음에도 이름에 걸맞은 추모, 현창시설이 없다.

2017년부터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를 설립하고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대구독립운동기념관 추진위’ 우대현 위원장을 만나 기념관 건립 당위성에 대해 들어보았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 현실로=박완서의 소설 ‘오만과 몽상’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동학군은 애국투사를 낳고 애국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우회적인 표현이지만이 소설 속의 이야기는 현대사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에게 현실로 나타난다.

우 위원장의 집안도 이 역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구한말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던 선친 우재룡 열사는 원산 형무소에서 16년간 옥살이를 하다 1937년 출소했다. 그때 선생의 나이 60세. 투옥 생활 후 돌아온 선생은 비로소 환갑 무렵에야 자녀(우대현 위원장)를 둘 수 있었다.

그는 ‘항상 두루마기에 중절모와 안경을 쓴 아버지의 모습이 6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른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어렵게 가정으로 돌아왔지만 선생은 1955년 우 위원장이 11살 때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 위원장은 ‘철없던 시절 온 가족이 단칸방에서 살며 고학을 할 정도로 살림이 궁핍 했다’며 ‘당시엔 이런 가난 중에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전념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대 이후 선친의 자료를 하나하나 찾아가며 행적을 조사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대구독립운동기념관 예상 조감도.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 제공

◆동구 용수동에 기념관 부지 1만여평 기증=2009년 선친의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은 집안에 큰 경사였지만 한편으로 대구시의 독립운동 현창 사업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중소도시 곳곳에 건립된 독립기념관이 광역시 대구에는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더구나 독립운동 관련 유적이나 사료들이 보관 할 곳이 없어 곳곳에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웠습니다.”

우 위원장의 이런 기념관 건립 의지는 2017년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를 발족 하며 첫발을 내딛었다. 이어 2020년에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되며 실무진들이 꾸려지고 청사진이 제시되었다. 

이 자리서 우 대표는 기념관 건립을 위해 대구시 동구 용수동에 사유지 4만7516㎡(약 1만4천평)를 기념관 건립 부지로 내놓았다. 아무리 각계에 진정을 해도 뜻이 잘 모아지지 않자 부지 기부를 통해 물꼬를 터보자는 취지였다.

“용수동이 대구 외곽지라서 기념관 건립에 적지(適地)가 아니라는 여론이 있는데 저도 동감합니다. 될 수만 있다면 두류공원이나 망우공원이  역사성, 근접성 면에서 더 좋을 수도 있지요. 저의 ‘용수동 부지제공’ 은 지역에서 기념관 건립에 대한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하나의 ‘외침’ ‘선언적’ 의미를 가집니다.”

◆새 정부 출범 후 기념관 건립 다시 한 번 기대=우 위원장의 이런 노력에도 아직 기념관 건립에 대한 정부나 자치단체의 구체적 움직임은 없다.

통합신공항, KTX 서대구역, 대구시청사 이전 등 큰 이슈들에 우선순위가 밀렸고 아직은 지역 여론이 독립운동 현창사업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 유일의 독립운동가 묘원(墓園)인 신암선열공원이 2018년 ‘국립’ 으로 승격된 점도 의미 중복, 중복투자 논란도 있을 것이다.

대선과 6·1 지방선거를 지르면서 우 위원장은 다시 기념관 건립에 희망의 싹을 틔우고 있다. 기념관 건립은 민간에서 추진은 한계가 있고 결국은 중앙이나 지방정부에서 정책적으로 나서야하기 때문이다.

현재 기념관 건립 보고서는 새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제출된 상태다.

우 위원장은 “정부와 관련 기관의 기념관 건립 필요성에 대해 강조해 국가보훈처에서 검토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안다”며 “이 보고서가 채택 된다면 2025년 광복 80주년 행사가 대구 독립운동기념관에서 열릴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백산 우재룡 선생.

◆백산 우재룡 선생은?=우재룡 선생은 대한 제국 때 대구부 진위대(鎭衛隊)에 입대해 무관 계급인 참교(參校)로 근무했다.1907년에 군대가 해산되자 선생은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해 연습장(練習將)으로 활약하면서 영일의 입암전투(立巖戰鬪) 등에서 용맹을 떨쳤다.

1908년 무기조달 관계로 대구에 숨어들었다가 잡혀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 되었다. 1911년 한일병합 특사로 석방된 선생은 박상진과 함께 ‘광복회’를 결성했다. 이 조직은 경상북도·충청남도·전라남도·황해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뻗어나가 1910년대 독립운동 국내 조직 중 가장 큰 규모로 발전했다.(영화 ‘암살’ ‘밀정’에도 등장하는 김원봉의 의열단은 대한광복회의 후신(後身)이다.)

1915년엔 군자금 모집을 위해 경주에서 세금을 운용하는 우편 마차를 공격해 8,700원(현 시세로 4억여 원 추산)을 탈취하기도 했다. 1918년 대한광복회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파괴당하자 1920년 주비단(籌備團)을 세워 조직 회복에 주력했다.

1920년 군자금을 모으던 중 일경에 체포돼 1937년까지 16년간 옥고를 치렀다. 1955년 선생은 대구에서 서거 했고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에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200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생을 선정하고 선생의 뜻과 정신을 기렸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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