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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듬뿍·추억 가득! 경북 전통시장 탐방] (1)안동중앙신시장

기사승인 2020.07.01  11:3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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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헴, 물렀거라!” 시장 곳곳 옛 유교문화, 양반 전통 생생히 간직

유교와 양반문화 전통이 서린 안동중앙신시장은 각종 제수, 제사용품과 관련한 점포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6·25전란 중에 시장이 형성돼 벌써 70년 역사를 자랑한다. 한상갑 기자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시내를 지나다 보면 자주 만나는 슬로건이다.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으로 대표되는 유교 전통과 하회마을, 하회별신굿탈놀이, 차전놀이로 이어지는 민속이 어우러져 독특한 문화 위용을 자랑한다.
홍건적 침입 때 경주로 몽진(蒙塵)을 가던 공민왕이 ‘편안한(安) 동쪽(東) 도시’에 반해 그대로 머물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근본 있는 도시’의 위엄은 안동의 전통시장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안동의 재래시장에서는 아직도 제사, 제수(祭需) 등 유교전통과 관련된 점포들이 많이 남아있다. 간고등어, 문어, 돔배기 같은 제수음식부터 안동포, 유기(鍮器) 같은 제례용품들이 주력 상품의 지위를 유지하며 시장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다. 시공(時空)을 초월한 물산(物産)과 문화의 만남, 20세기 안동에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전통과 현대, 역사와 문화가 한 공간에서 동거(同居)하고 있는 안동으로 떠나보자.

◆6·25동란 후 옥야동 일대에 노점 난립...1970~80년대 호황
안동중앙신시장의 역사는 해방 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0년 경북선이 안동을 지나가며 지역의 모든 물자는 안동역을 중심으로 몰리게 된다. 역전을 중심으로 가게들이 번창하자 1946년 안동시는 안동신시장을 상설시장으로 허가했다.
겨우 싹을 틔운 안동신시장은 아쉽게도 6·25전쟁 중 전화(戰禍)에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옥야동 일대를 중심으로 노점이 하나둘씩 생기고 얼기설기 엮은 판자촌, 가건물이 들어서면서 시장 형태를 다시 갖추기 시작했다. 휴전 이후 시장 주변으로 전쟁으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양철지붕에 판자집 형태 하꼬방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지금의 현대식 상가건물이 들어선 것은 1964년 무렵. 자금력이 있는 상인들은 콘크리트가게에서 점포를 운영하고 영세상인들은 재래식 목조건물에서 가게를 꾸려갔다.
대부분의 재래시장이 그렇듯 전통시장의 호황기는 1970~80년대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각 가정마다 보통 5~6남매에 10명이 넘는 대가족이 기본 이었다. 의복, 문방구, 식량 등 생필품은 항상 모자랐고 이런 공산품을 얻기 위해 집안의 농산물이나 가축을 팔아야했다.
당시 장날은 밀려드는 장꾼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유입되는 시민, 상인들만큼 물자의 유통도 넘쳐났다.
40년째 그릇가게를 운영했다는 한 주인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자전거를 타고 시골로 배달을 다니기에 바빴다’고 한다. 전화로 주문이 쇄도해 배달을 맞추느라 온 가족이 장사에 매달릴 정도. 하루 종일 배달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그대로 곯아떨어질 정도였지만 전대에 가득 찬 돈을 보며 피로를 잊었다고 한다.

시장 곳곳엔 간고등어, 문어, 돔베기, 안동포 등이 아직도 시장의 한 부분을 굳게 지키고 있다.

◆양반 문화, 유교 발달한 도시 특성 따라 제수시장 번창
안동의 전통시장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제사, 제수용품이 활성화 되었다는 점. 안동이 유교, 양반문화의 중심지인 만큼 제의(祭儀)에 필요한 물자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요즘도 가을철이면 향사와 시제를 모시기 위해 제수용품 상가가 붐빈다.
안동의 특산물 중 간고등어를 빼놓을 수 없다. 안동이 내륙에 위치하다보니 옛날부터 염장(鹽藏)기술이 발달했다. 지금도 염장을 하는 간잽이들이 많은데 솜씨 좋은 일꾼은 하루 거액 일당을 주고도 모시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간고등어의 염도와 숙성 정도는 간잽이들의 감(感)에서 결정 되는데 이들의 손끝을 거쳐 안동의 명품 먹거리로 탄생하게 되었다.
상어를 토막 내고 포를 떠서 소금에 절인 ‘돔배기’도 이곳 제사상에 올리는 대표적 생선이다. 이곳 사람들은 상어를 ‘교어’(鮫魚)라고 부르며 특별히 아꼈는데, 이는 상어가 오장과 간폐를 돕는 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안동신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포는 문어가게다. 시장에서는 매월 가을에 ‘문어대축제’를 열 정도로 문어 유통이 활발하다. 내륙 한복판에서 열리는 문어축제가 생뚱맞기는 하지만 한 때 안동이 최대 문어 소비처라는 것을 안다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문어는 안동에서 생일, 결혼, 회갑, 상례, 제사 등 행사에 빠지지 않는다. 특히 제사상차림에 문어를 챙긴 것은 문어의 문자가 ‘글월문’(文) 자를 써서 학문을 숭상하는 분위기와 맞았고, 또 급할 때 먹물을 뿜어 위기를 면하는 처세도 선비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안동중앙신시장엔 40년 이상된 노포들이 많아 독특한 먹거리로 시민들의 시장기를 달래준다. 시민들이 떡을 사기위해 북적이는 모습.

◆40년 전통 해장국, 45년 역사 떡집 등 전국적 유명세
안동의 시장에도 40년 이상 된 인기 노포(老鋪)들이 많다. 28일 취재를 위해 안동을 찾았을 때도 떡집, 식당가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 별미 중 으뜸은 단연 선지국집 ‘옥야식당’이다. 가마솥에 사태고기와 선지에 고사리, 토란대, 시래기를 넣고 푹 끓여내는데 식사 때마다 긴 줄을 세울 정도로 인기가 높다. 달작 지근한 국물 맛은 선지국보다는 육개장에 가까울 정도로 맛이 깊고 그윽하다.
45년 역사를 자랑하는 ‘서후떡집’도 시장 입구에서 손님들을 끌어당긴다. 땅콩, 강낭콩이 듬뿍 들어간 콩설기와 쑥이 들어간 찰떡을 콩고물에 묻혀 낸 인절미쑥떡도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TV’에 여러번 출연한 적이 있는 ‘수리수리마수리떡집’도 시장 명물이다. 안동 산마와 자연산 수리취나물을 혼합해 만든 것으로 실온에서 이틀, 냉장상태서 일주일을 놔둬도 굳지 않는다.
인근에 있는 ‘버버리찰떡’도 70년 동안 시장을 지켜온 대표 간식이다. 한번 먹으면 그 맛에 반해 그 자리서 벙어리가 된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김노미 할머니가 경북선 철길 밑에서 찰떡에 팥고물을 묻혀 팔면서 유래됐다.
주인 이보랑 씨는 당시 “할매가 힘들게 떡집을 운영하는 것을 보고 이발사도 와서 떡을 치고 길 가던 순사도, 체보(우체부)도 한말씩 쳐주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며 “그래도 그 전통 덕에 연간 300만개 이상이 전국으로 팔려나간다”고 말한다.

◆IMF 이후 점차 쇠퇴... 최근 청년몰 입주로 새바람
1970~80년대 호황기를 구가하던 전통시장은 IMF이후 쇠퇴기를 맞는다. 안동댐·임하댐이 건설된 이후 농촌 인구가 감소하고, 농업의 기계화, 대형마트의 입점, 경기침체가 겹치며 시장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은 점차 줄어들었다.
전통시장은 이제 젊은이들이 호기심에 찾거나, 오랜 단골들만 찾는 추억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중앙신시장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통시장 살리기 사업을 추진 중이다.
2016년엔 청년창업사업으로 10개 점포가 1지구 포목상점 내에 입점했고, 2018년에는 20개 점포가 추가로 문을 열었다. 청년상인들이 입점하면서 시장 거리도 깨끗해지고, 형형색색의 다양한 조형물이 상가를 장식하고 있다.
스테이크하우스를 운영하는 권달우 대표는 “청년들은 번쩍이는 아이디어와 각자의 ‘필살기’로 시장에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며 “‘안동 오고가게’라는 브랜드를 창안해 젊은층들을 장터로 끌어들이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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