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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듬뿍, 추억 가득!] 대구시 중구 남성로 약령시장

기사승인 2022.11.20  16: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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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대구 한약재는 중·일·동남아는 물론 중동·유럽까지 수출

2022년 대구약령시한방문화축제 ‘한약재 썰기 대회’에 참가한 약재상들이 열심히 한약재를 썰고 있다. 대구시 제공

조선 후기 대구의 경제를 일으킨 주축을 들라면 서문시장과 약령시쯤 될까. 서문시장이 전국 3대 시장으로 부상하며 유통, 상업도시로서 기초를 닦았다면, 약령시는 대구를 국제적인 한방도시로 도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대구의 약재는 왕실 진상품의 단골 메뉴였고, 사문진나루터 대일(對日) 무역선에는 차·인삼·약재 등 약재들이 대마도를 거쳐 후쿠오카, 오사카, 도쿄 등지로 실려 나갔다. 이 시기 대구의 한약재는 조선, 중국, 일본은 물론 멀리 동남아, 중동을 거쳐 멀리 유럽까지 퍼져나갔다고 한다.

현재 대구에 첨단의료복합단지가 들어선 게 우연이 아니고 이미 3백여 년 전에 닦아놓은 공력(功力)의 덕이라는 게 입증된 셈인데, 어쨌든 대구는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의료도시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약령시장은 전통시장 역사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 약재의 유통엔 금호강, 낙동강을 통한 수운(水運)과 영남대로를 통한 육상 운송이 활발했고, 이 과정에 고령, 성주, 칠곡 경산, 청도부터 안동, 영양, 봉화 등이 약재의 생산과 유통에 깊이 연결되었다.

조선 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구의 곳간을 넉넉히 채워주고, 지역에 건강과 관련된 좋은 기운과 풍속이 깃드는 데 기여한 대구 약령시로 떠나보자.

 

◆대구 약재는 중국, 일본 넘어 동남아, 유럽까지 수출=조선후기 대구는 진주, 원주와 함께 3대 약령시 중 하나였고, 그 규모와 거래량에서 전국 최고를 자랑했다고 한다. 일찍부터 대구의 약재 거래가 활기를 띤 이유는 앞서 언급한 대로 대구 주변에 약재의 명산지들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1601년(선조 34년)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된 이후 대구가 영남 좌·우도의 교통요충지로 부상한 점도 대구가 한방도시로 성장하는데 기여했다. 대구엔 낙동강, 금호강이 접해 있어 남해부터 영남 내륙까지 물길로 다 연결됐고, 이 물길은 다시 영남대로, 추풍령을 통해 육운(陸運)으로 이어져 서울과 통했다.

17세기 들어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모든 관수(官需), 민수용품을 시장에서 조달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시장과 화폐경제가 발달한 점도 대구 약령시 발달의 주요 이유였다.

시장이 들어섰다고 해서 처음부터 민관(民官)을 아우르며 지역 상업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장이 처음 열린 효종 연간은 경상감영 서편에서 관청의 통제 하에 약재가 거래되었다. 약재 생산자와 상인들은 장이 서는 날 객주, 여각, 거간(居間)의 알선을 받으며 거래를 했는데 이 중개인들이 관청의 지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성격이 강했다.

도시와 시장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1907년 약령시는 남문 밖 지금의 약전골목으로 이전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시장이 활성화되고 민족자본이 형성 되자 일제는 1914년 ‘조선시장규칙’을 정해 약재상업과 상인들의 활동을 제약했다. 일제의 간섭과 방해 하에서도 약재상들은 동맹회를 결성해 상업, 금융, 운임, 거래 등에서 약진을 이루며 시장을 발전시켰다.

대구 근대사를 연구하고 있는 환경운동연합의 최진문 운영위원은 “조선 후기-일제강점기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약령시는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거래선을 넓혀가며 상업 자본을 일구었다”며 “그 시절 대구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재화, 용역이 몰려들고 물자가 넘쳐 지역 경제를 크게 확장해갔다”고 말했다.

1907년 현재의 자리(중구 남성로)로 이전한 약령시는 6·25전쟁 포화 속에서도 대구 경제의 근간으로서 자리를 지켜왔다.

현재 약령시의 물리적 공간은 반월당 옛 중앙파출소 앞에서 계산동 매일신문 근처 약령서문에 이르는 약 700m 거리를 말한다. 현대에 들어와 ‘약전골목’으로 명칭도 바뀌었고 운영주체도 민간상인 회로 넘어와 관의 통제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약전골목 동쪽 출입구 모습. 한상갑 기자

◆1970-90년대 전국에서 약재도매상들 몰려들어=약전골목은 여타의 전통시장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재래시장이 구획된 상가에서 밀집된 형태로 영업을 한다면, 약전골목은 넓은 골목을 배경으로 시가(市街) 형태를 띠고 있어 쇼핑 환경면에서도 쾌적하다.

전통시장이 식음료, 잡곡, 야채, 식당가 등 수십여종 업종이 모여 있다면, 약전골목은 한의원, 약재상 등 한방 관련 품목으로 단일화되어 있다는 점도 다르다.

또 약전골목엔 시장의 핵심 요소인 음식 상가들이 빠져 있는데 이는 바로 뒤 염매시장, 화교음식거리 등에서 이 기능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어느 골목이 든 부침과 성쇠가 있기 마련인데 해방 이후 약전골목의 전성기는 1970-90년도였다.

김정자 문화유산해설사는 “이 당시는 백화점이 일부 상류층의 쇼핑 공간으로 한정되고 구매처들이 다양화되지 못한 시점이라서 대부분의 구매가 시장에서 이뤄졌다”며 “약전골목엔 대구 인근 약재상은 물론 전국에서 도매상들이 몰려들어 성시를 이뤘다”고 말한다.

이 당시엔 각 점포마다 종업원들을 3-4명씩 고용해 약재를 가공하고 물건을 배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장날이 따로 없는 상설시장 형태였지만 거리는 언제나 인파로 붐볐고 점포마다 흥정소리가 골목을 울리던 때였다.

이런 흥행을 배경으로 상인연합회에서는 1978년 대구약령시한방문화축제를 기획했다. 독특한 아이템과 뚜렷한 테마 덕에 축제는 전국적 축제로 거듭났고, 이 성공에 힘입어 약전 골목은 한국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약령시한의약박물관 옆에 위치한 ‘약령문’.

◆약선요리, 한방 퓨전음식 개발 등 변화 모색을=전성기를 구가했던 약령시도 시대가 변한 탓일까. 요즘 그 명성도 점차 빛이 바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홈쇼핑 등 온라인 마케팅이 본격화되며 전통시장을 찾는 발길이 현저히 줄었기 때문이다. 현재 약전골목의 유동 인구는 20년 전의 10~20% 밖에 안 된다고 한다.

더욱이 요즘 젊은 세대들의 한방 기피가 뚜렷해지면서 미래도 더 암울하다. 현재 이 골목을 찾는 사람들은 70-80대 어르신들과 오랫동안 거래를 이어온 소수의 단골들뿐이다.

2011년 현대백화점이 들어오면서 골목상권 침해가 더 가속화되고 있다. 우선 점포세가 3~4배나 뛰어 영세상인들이 모두 떠난 지 오래다. 최근 10년 새 약전골목을 떠난 업체는 100곳이 넘는다고 한다. 상권의 변화는 매출 격감, 임대료 상승으로 연결되었고 약전골목의 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47년째 한약방을 운영해온 신전휘 대표는 “대형 백화점이 들어오면서 약전골목이 카페골목, 식당골목으로 바뀌었다”며 “정부나 자치단체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문화재 하나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임규채 대구경북연구원 경제일자리 연구실장도 “이제 약령시장은 새로운 수요에 대응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전통적인 한방 중심에서 벗어나 약선요리, 한방 퓨전음식점 등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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