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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 점포] 자인시장 ‘뻥튀기천국’ 최기한 대표

기사승인 2022.09.06  10: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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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인, 청도시장서 43년 뻥튀기 인생... TV에 소개되며 전국 명물로

자인시장의 명물 ‘뻥튀기천국’의 최기한 대표가 뻥튀기 기계를 손질하고 있다. 한상갑 기자

‘7홉이 한말이 되니 실로 놀랍다, 돈 모으기의 제왕.’ 1932년 1월 동아일보에서 뻥튀기를 소개한 기사다.

뻥튀기의 원리는 ‘압력이 가득한 용기에 곡물을 넣고 가열한 후 갑자기 뚜껑을 열면 압력에 의해 곡물이 수 배로 부풀리는 작용’이다.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곡물팽창기’는 곡식을 최고 15배 이상 부풀리는 ‘마법’을 무기로 오랜 기간 동안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튀겨 낼 때 나오는 특유의 폴발음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어릴 적 장터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소환되는 추억이기도 하다.

아직도 뻥튀기는 60~80대 어르신들에게 주요한 간식거리일 뿐 아니라 추억의 음식인 덕에 웬만한 장터엔 뻥튀기 장수들이 나름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경산 자인시장 입구에도 뻥튀기에 가게가 있다. 상호도 ‘뻥튀기천국’이고 상호 옆에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는 이력도 붙여놓았다. 자인시장 뻥튀기천국 최기한 대표를 만나 그의 43년 뻥튀기 인생에 대해 들어보았다.

 

◆자인시장에서 강정, 뻥튀기 물량 맞추느라 밤샘 작업도=최 대표와 뻥튀기와의 만남은 작은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최 대표가 20대 후반 무렵 옆집에 뻥튀기 장사가 이사를 왔다. 최 대표는 호기심에 장사를 거들며 장터를 따라다녔다.

주인은 술을 좋아하는 한량이었는데 잦은 주사(酒邪)로 기계를 비우기 일쑤였다. 조수였던 최 대표는 엉겁결에 뻥튀기 기계 주인이 되었다.

기계 조작에 능하고 눈썰미가 좋았던 그는 바로 기술을 익혔고 ‘최 씨의 뻥튀기가 근방에서 제일 맛있다’는 소문이 나며 금방 자리를 잡았다.

그가 처음 뻥튀기 기계를 설치한 곳은 대구 신평리시장 입구였다. 가스불이 없던 시절 당시엔 장작불을 때고 손으로 기계를 돌리는 등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해야 했다. 이렇게 대구에서 10년 넘게 갖은 고생을 한 끝에 점포를 일구고 돈도 모았다.

그 무렵 경산 자인시장에 마침 좋은 가게가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귀향을 동경했던 최 대표는 망설임 없이 계약을 하고 자인에 정착했다.

오일장이 살아 있던 자인시장은 최 대표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장날만 되면 가게 앞으로 손님들이 줄을 섰고 최 대표는 특유의 넉살과 일솜씨로 단골들을 늘려갔다.

1990년대 후반 당시 명절엔 강정이 대세였다. 당시만 해도 대가족 시절 이어서 강정 주문은 보통 한 말 단위였다. 최고 전성기 때 직원을 7명이나 두었고, 한 달 인건비로 3000만 원이 들어간 적도 있었다. 물론 명절 반짝 특수 1~2달이지만.

최 대표는 당시 주문 물량을 맞추느라 눈코 뜰 새없이 바쁘게 지냈다. 특히 시골 시내버스 막차 시간에 맞춰 강정을 만들어내느라 거의 점심은 건너뛰기 일 수였다. 할머니들 주문량을 막차 시간에 맞춰내느라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면, 이제 다시 배달 물량을 위해 야간작업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자정, 철야까지 작업을 하다 보니 그동안 건강도 많이 상했다.

 

◆한 방송사 프로그램 출연 이후 전국적인 명물로 데뷔=어느 덧 장날이면 그의 가게 앞에 줄이 늘어서며 시장의 명물로 자리를 잡았다. 기대했던 만큼 수입도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장날을 제외한 날에는 손님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지만 시골의 모든 거래, 유통은 오일장을 기준으로 돌아간다. 그러다 보니 한 달 6~7일과 주말을 제외하면 한 달에 절반 이상은 점포를 놀려야했다.

고민 끝에 최 대표는 청도 새벽시장에도 진출해 영업 공백을 메우기로 했다. 장비를 신고 두 도시를 오가는 것이 부담은 되었지만 가게를 놀리는 것보다 나았고 비례해서 수입도 늘려갈 수 있었다.

장터를 오가며 열심히 장사를 해오던 최 대표는 어느 날 한 방송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가게 출연, 소개 요청이었다.

‘서너 시간 촬영하면 끝나겠지’ 하고 허락한 취재는 무려 3일동안이나 계속되었고, 무리한 방송 스케줄에 맞추느라 너무 고생을 했다. 심지어 제작진과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터 미담을 소개한 ‘꽃보다 아름다운 뻥이요’가 방송에 나가면서 아침부터 장꾼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장날마다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진을 쳤지요. 주문량도 5~6배로 늘었습니다. 이런 ‘방송 효과’가 서 너 달은 간 것 같아요.”

SBS 방송 직후 전국에서 방송 출연 요청이 줄을 이었다. 언제 그의 전화번호가 알려졌는지 PD, 작가들이 쉴 새 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황금 연못’ ‘인간극장’ ‘자연에 산다’ ‘6시 내고향’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방송사에서 섭외가 잇따랐지만 모두 거절했다.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이 방송에 나가 개인생활 노출이 심하고, 영업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지역 방송과의 친분은 어쩔 수 없어서  TBC ‘시장은 살아 있다’ ‘리얼 통’ 등에 5~6번 정도 출연해 주민들과 시장 애환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자인시장 ‘뻥튀기천국’의 최기한 대표가 강냉이 튀밥을 튀기고 있다.

◆콩자반, 각종 건강 차 전국에서 주문=사실 어느 장터마다 뻥튀기 장사가 한두 곳은 다 있다. 그럼에도 최 대표가 대중의 흥미와 관심을 끈 것은 첫째 40년 넘게 일터를 지켜온 그의 성실성과 상혼이 시청자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촬영 당시 입었던 작업복도 화제가 되었다. 최씨는 20년 전 시장에서 500원 주고 산 점퍼를 소매가 닳도록 입었고, 그 옷 하나로 경북 장터를 누비고 다녔다고한다. 그 옷은 어느새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이런 사연들이 장터 분위기와 함께 어울려 시청자들에게 정감 있게 다가갔던 것이다.

이런 스토리텔링 외 최 대표의 차별화된 상품 메뉴도 오늘날 그가 자리를 잡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의 점포엔 뻥튀기 제품 외 유독 택배, 주문 물량이 많은데 바로 콩자반 때문이다. 콩자반은 보통 삶아서 간장으로 양념을 하는데 최 대표는 콩을 뻥튀기 기계 속에서 가열해서 뜨거운 열로 익힌다. 여기에 그의 양념비법이 어울려 명품 콩자반이 탄생한다.

한번 이집 콩자반을 먹어본 사람은 대부분 재주문으로 이어진다. 이 덕에 가게 매출보다 전국 택배물량이 훨씬 더 많다. 출향인사들이 명절을 세고 돌아갈 때 선물용으로 5~10개씩 사서 들고 가는 것도 여기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뻥튀기 기계 안에서 고열로 덖은 각종 차(茶)들도 최 대표의 인기 메뉴들이다. 현재 가게에선 돼지감자, 우엉, 둥글레, 보리, 옥수수, 여주 등 전통차들을 취급한다. 일반 가게에서는 프라이팬이나 솥에 볶아 깊은 맛이 나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무쇠 탱크’ 안에서 고열, 고압으로 볶아내 시중 제품보다 더 깊은 맛이 난다. 

올해로 43년을 맞은 최 대표의 뻥튀기 인생. 그동안 장터를 다니며 고생을 했고 때론 이 일이 부끄러워 일부러 고향을 피해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계 덕에 자녀들도 모두 성장해 자리를 잡았고 점포는 든든히 부부의 노후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건강만 허락되다면 50년을 마저 채우는 게 그의 희망이지만, 이 일이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기에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 이라고 말한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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