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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듬뿍·추억 가득! 경북 전통시장] (32)안동 풍산시장 

기사승인 2022.08.05  1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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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산김씨·안동김씨 등 집성촌에 위치...양반가 생필품 공급처로

안동 풍산시장 입구 모습. 안동시 제공

이름부터 넉넉한 안동시 풍산읍은 옛부터 사람이 몰리고, 물산(物産)이 넘쳐 ‘풍산’(豐山)이란 지명을 얻었다.

마을 뒤로는 학가산과 천등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앞으로는 낙동강과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세를 하고 있다.

이런 넉넉한 물자와 풍속을 바탕으로 마을마다 전통 부락들이 자리를 잡았다. 예안(禮安)이씨, 진성(眞城)이씨, 전의(全義)이씨, 영양(英陽)남씨 풍산(豐山)김씨, 안동(安東)김씨 등 500여 년 세거지를 이어오고 있는 마을들은 단순한 집성촌 의미를 넘어 한국 명문가의 품위와 전통을 자랑한다.

오늘 소개할 풍산시장은 바로 이런 명문 가문들과 민초들의 의식주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안동 반가촌에서 수백년동안 5일장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풍산장으로 떠나 보자.

풍산시장 장날 내부 모습.

◆영남좌로-신작로 통해 영남 물류의 중심으로=‘한국정신문화의 수도’로 불리는 안동은 일찍부터 물자와 사람이 몰려들어  활발한 경제 활동이 이루어졌다.

조선후기에 벌써 11개의 시장이 열렸다는 기록도 보인다. 안동이 유통, 상업도시로 성장한 배경에는 일찍부터 명문가들이 대규모 마을을 이루며 자체적으로 경제 규모를 키워온 이유도 있겠지만 옛 영남대로의 후광도 크게 작용했다.

부산-대구-문경새재를 거쳐 서울로 이어지는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물자 수송, 교통, 행정은 물론 인문학적 차원에서도 서울 지방을 있던 교역로이자 소통로였다.

안동은 영남대로의 주요 노선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서울로 가던 또 하나의 구간인 영남좌로(嶺南左路: 영천-안동-풍산-죽령-서울)에 포함돼 물자, 교통, 교역의 한 거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 길을 통해 보부상, 장꾼, 아전, 민초들은 서울과 영남을 왕래했다.

안동 출신 이재규 교사는 “사료에는 없지만 죽령으로 향하는 길목인 안동-풍산읍엔 장사꾼, 관리, 역졸들이 모여 들어 주막, 장시가 활성화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오늘 소개할 풍산읍 안교리에도 조선시대 안교역(安郊驛)이 설치돼 조령과 안동을 잇는 주요 교통로로 기능했다.

17세기 각 읍면 지역에 10곳이 넘는 역(驛), 시장이 들어선 건 안동이 영남대로의 중간에서 입지를 살려 물자, 유통의 한 축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개항 이전에도 영남지역엔 영해로(문경-안동-영덕-영해)와 울산로(상주–의성-울산) 등 도로 체계가 운영됐다. 이중 영해로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갈 때 거치는 길이었고 당시 안동은 낙동강을 이용한 수륙(水陸) 교통 장점을 살려 영남의 물류 허브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시대 상업도시 안동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졌다. 당시 안동은 영남에서 이미 대규모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는 한편으로 일제의 수탈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 시기 안동 유통, 상권의 키워드 역시 ‘길’(路)이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영남대로의 전통이 일제의 신작로(新作路)로 대체된 것이다. 당시 문경-안동-영덕엔 34번 국도가 뚫렸는데 이 신작로들은 일제의 산미증산계획, 태평양 전쟁 물자 조달 통로로 이용되었다.

장날 한 노점상이 상어돔배기를 팔고 있다.

◆반가촌 시장답게 향로, 탕건, 제수용품 많이 거래=일제가 도로를 개설하며 전국적으로 미곡, 전쟁물자 수탈을 자행하였지만 한편으로 식민 통치 과정에서 근대화도 함께 추진된 건 사실이었다. 1930년대 안동엔 기관차, 자동차가 다니고 전기가 들어오는 등 문명의 수혜도 있었다.

이런 산업, 상업이 발달 힘입어 일제강점기 안동 시내엔 7개의 전통시장이 개설되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17년에 개설된 풍산시장도 이런 사회, 경제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당시에도 안동 상권의 중심은 지금의 신시장(옥야동), 구시장(서부동) 일대였고 풍산시장은 주변 집성촌들의 생필품 공급처로 기능했다.

시장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풍산장 주변에 동족 부락과 종가(宗家)가 많아 예로부터 기제사, 불천위제사를 많이 지낸다”며 “1980년대까지 장날이면 탕건, 향로, 제기(祭器)와 같은 제사, 제수용품들이 거래 되었다”고 말했다. 

전통시대 풍산시장은 지역 부락들의 과일, 철물, 땔감, 곡물들을 주로 거래했다. 1960년대 풍산시장 근처 마애리나루터 사진들을 보면 나루터 손님의 절반이 땔감장사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장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에도 나무꾼들이 유독 많은데 그만큼 땔감시장이 활발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풍산시장이 들어선 안교리는 조선시대 안교(安郊)역촌(驛村)이 있던 곳이다. 현재 750여 세대에 1,5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시골 아낙네들의 휴식 공간이고, 마을 어르신들의 거래 장소였던 풍산시장은 예전만은 못 하지만 시골장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지금은 오일장(3, 8일)에만 반짝하고 평소에는 입구와 큰길가에 점포들만 문을 연다.

얼마 전 장날을 맞은 풍산시장에 들렀는데, 읍(邑)단위 오일장 치고는 규모가 제법 컸다. 노점엔 인근 어르신들이 직접 재배한 양파, 과일, 고추와 인근 마을에서 온 잡화상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시장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풍산장 하면 어린 시절 험상궂고 덩치가 크고 무섭던 소장수들과 불을 뿜던 차력사들이 떠오른다”며 “겨울철 뻥튀기 장수 앞에서 구경하다 한줌씩 얻어먹던 강냉이 생각이 많이 난다”고 회상했다.

한편 풍산시장엔  48년 전통의 ‘대구식육식당’이 장날 장꾼들은 물론 평일에도 전국의 미식가들을 불러들인다. 직접 만드는 달달한 육수에 고기를 잘잘하게 끓여낸 이곳 소불고기는 특유의 감칠맛을 자랑하며 경북의 셀럽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재규 교사는 “풍산시장은 전통시대 안동의 집성촌들의 유통, 경제의 중심지”였다며 “양반문화 콘텐츠와 전통시장 콘텐츠를 잘 조합하면 괜찮은 관광 상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저작권자 © 디지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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