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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듬뿍·추억 가득! 경북 전통시장] (30)상주 함창시장

기사승인 2022.07.25  17: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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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엔 고녕가야의 도읍, 조선시대엔 뱃길·육로로 영남-서울 연결

낙동강 상류에 위치했던 상주는 경북 북부 지방의 세곡과 조운(漕運), 특산물들을 한양으로 보내는 수운(水運)의 상류 종착지였다. 사진은 상주 함창시장 내부 모습. 한국관광공사 제공

상주 지역 고대사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들이 있다. 상주지역 곳곳에 등장하는 소국(小國)들의 이름이다.

상주엔 대표적인 사벌국(沙伐國) 외에도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난미리동국(難彌離彌凍國),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호로국(戶路國) 등이 있고 함창에도 고녕가야국(古寧伽倻國)과 관련한 기록이 보인다.

소국의 명칭에도 변진, 가야 등이 등장하면서 삼한시대에 변진 소국들이 상주에 있었다는 건지, 고령·김해 중심의 가야가 상주까지 세력을 떨쳤다는 건지 학계의 견해도 분분하다.

어쨌든 소국들이 상주를 근거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는 것은 당시 이 지역이 (부족)국가를 일으킬 정도로 경제, 군사적으로 세력을 형성했다는 것을 뜻한다.

한때 경북 북부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벌국과 고녕가야국 등 소국들은 3세기 후반 당시 영남의 맹주였던 경주 세력에게 병합되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고대부터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강점기까지 영남 북부지방에서 유통, 상업도시를 뿌리를 내렸던 상주, 그중에서도 함창읍의 전통시장을 돌아보았다.

◆함창은 옛날부터 물길·도로가 발달, 상업도시로 주목=조선시대 상주는 육로·뱃길로 서울과 남해로 통했던 교통의 요지이자 유통의 핵심지였다.

낙동강 상류에 위치했던 상주는 경북 북부 지방의 세곡과 조운(漕運), 특산물들을 한양으로 보내는 수운(水運)의 상류 종착지였고, 문경새재로 통하는 함창읍 나한리 일대는  보부상, 장꾼, 역졸들의 서울 나들이길이었다.

소백산맥 남쪽 사면과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함창은 분지지형을 형성하며 일찍부터 도로가 발달했다. 조선시대 문경과 상주를 있는 남북간 도로와 보은과 용궁(龍宮)을 있는 동서 도로가 일찍부터 열렸다.

함창 관아 동쪽엔 덕통역(德通驛)이 있어 문경 함창-상주-선산 방면으로 통하는 역로(驛路)를 담당했다고 한다.

함창고교의 임종득 교장은 “함창은 조령(鳥嶺)이나 황령(黃嶺)의 길목에 위치해 일찍부터 도로가 뚫려 동해, 내륙과 교역이 열렸다”고 말했다.

1924년 개통된 경북선도 한때 상주, 함창을 경제·상업도시로 이끈 주역이었다. 일제강점기 함창의 탄광에서 나오는 석탄과 경북 북부 농산물을 공출(供出)하기 위해 건설 되었지만 어쨌든 이 경북선은 함창에 광부들과 화물을 불러들이며 함창 경제를 일으키는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석탄산업이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폐광이 늘어나자 함창 경제에 큰 그늘이 그리워지게 되었다. 화물, 여객 수요가 급감하자 1995년 화물 취급이 중단되었고 2004년엔 역무원이 배치되지 않은 간이역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과일을 팔고 있는 노점상. 김광희 씨 제공

◆1951년에 세워진 함창시장, 지역 경제 발전의 효자=상주에 재래시장이 처음으로 열린 것은 1912년으로 남성동 상주시장이 그 첫 단추였다. 그후 상주엔 공설시장 20곳, 사설 시장 2곳으로 늘어나며 지역상권 발전과 주민들의 소비생활에 편의를 제공했다.

상주시장 다음으로 역사가 오래된 것은 함창시장으로 1951년에 세워졌다. 한국 전쟁 중에 함창에서 시장이 열린 것은 당시 함창이 낙동강 전선의 안전지대에 위치해 비교적 적의 공습에서 안전했기 때문이다.

또 경북선을 통해 석탄, 아연, 철, 구리 등 전시물자가 집중돼 여객과 화물이 수송이 활발했던 것도 함창시장 개시(開市)의 중요 원인이었다.

함창 재래시장의 역사를 기록한 ‘함창현지’(咸昌縣誌) 에는 ‘구향장(함창장)은 관문 밖에 있으며 1일과 6일에 장이 열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토산품으로는 은어·송이·감·호도·연실, 왕실 진상품(貢物)은 인삼·백작약·천남성·구기자·백복령·감국·은어·홍시·호도’라고 적혀 있다.

1951년 개설 당시 함창시장은 노점 100여개가 들어설 정도로 큰 규모였다. 특히 1960년에는 우시장이 들어서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우시장은 20~30리 밖에서 소몰이꾼들이 몰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고 시장엔 마부들을 수용하기 위한 여관과 주막이 번성했다고 한다. 

◆유통구조 개편, 산업화 이후 전통시장 쇠락의 길로=고대부터 문명을 일군 함창은 조선-일제강점기-1980년대까지 나름 상업도시 전통을 이어 왔지만 이곳 역시 이농, 산업화시대, 유통구조 개편의 그늘을 피해 가지 못했다.

젊은 시절부터 시장을 다녔다는 한 어르신은 “현재 시장자리 한가운데는 약장사, 옷가게, 양곡상, 어물전, 물감장사, 씨앗장사가 진을 치고 새벽부터 흥정소리가 요란 했었다”며 “어릴 적 장터 한켠에서 앉아서 먹었던 각기우동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곳이 한때 30리 밖에서도 장꾼들이 몰려들었다는 큰 시장이 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1, 6 장날이다.

주변에 어르신들은 장날만 되면 양파, 파, 상추, 자두, 복숭아, 참외 등 집에서 경작한 과일 채소들을 리어카나 광주리에 싣고 나온다. 또 인근에 노점상들도 장날이면 그릇, 신발, 등산복에 생선, 해물을 트럭에 싣고 와 길가에 부린다.

호미, 낫, 칼, 빗자루 등을 싣고 온 한 잡화 노점상은 “주변 면(面) 단위 오일장은 거의 다 사라졌는데 함창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며 “이런 전통장도 시장에 나오시는 어르신들이 사라지면 여기도 자연스럽게 폐장(閉場)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시장 한 켠에는 ‘함창장유래비’가 서있다. ‘한때 고녕가야의 도읍지였고 우리나라 최초 협동조합의 발상지 였다’고 시작한 서두(序頭)는 이내 말미엔 ‘산업화, 도시화 이후 점점 활력을 잃어 아쉽다’는 탄식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 비를 제작한 읍민들의 바람처럼 함창시장이 다시 ‘다함께(咸) 번창 (昌)’하는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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