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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인물] 대구시 엘바이엘 이유정 디자이너

기사승인 2021.08.26  15: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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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패션업계 코로나 우울 털고 다시 한번 비상했으면”

엘바이엘 이유정 대표가 대봉동 사무실에서 자신이 다자인한 의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상갑 기자

 

김선자, 박동준, 최복호, 전상진, 이영도, 변상일, 김우종, 도향호... 1970~80년대 대구 패션계를 풍미 했던 디자이너들이다.

당시 서문시장은 전국 직물도매시장의 30~40%를 점유할 정도로 한국 섬유 상권의 중심이었다. 특히 1989년 대구에서 열린 ‘대구 컬렉션’은 우리나라 최초 컬렉션으로 알려진 S.F.A.A보다 앞서는 것으로, 한국 패션산업에서 대구의 선진성, 진취성을 잘 설명해 준다.

프랑스, 서울의 유명 디자이너들이 원단을 구하러 대구에 올 정도로 대한민국 섬유산업을 이끌었던 대구 섬유, 패션사업은 1990년대 이후 동대문상가에 상권을 내준 후 침체일로를 거듭하고 있다.

이런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지역 패션산업 발전을 위해 고군분투 하는 디자이너가 있다. ‘엘바이엘’의 이유정 디자이너다.

지역 섬유, 패션산업의 우울한 전망과 코로나 19 블루 속에서 희망의 재봉질을 멈추지 않고 있는 이유정 대표를 대봉동 사무실에서 만나보았다.

-코로나 19가 전 산업을 삼켜 버렸다. 대구 패션업계의 피해는?

▶일단 섬유, 패션, 웨딩 등 대구의 기반산업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코로나 19 이전에 중동, 유럽, 미국 바이어들과 활발하게 접촉하며 상담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 루트가 완전히 끊겨 버렸다. 수출 상담, 계약의 전제가 되는 세계 패션쇼, 해외 전시회도 올 스톱돼 관련 업계들이 경영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특히 우리 입장에서는 미국 수출, 판로가 막힌 것이 가장 아쉽다. 뉴욕의 백화점에 입점해 매출이 활발하게 이루지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사업 확장을 계획하던 시점 이어서 아쉬움이 크다.

-꼬마 때부터 의류,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다. 존경하는 디자이너는.

▶할머니, 외할머니가 규방 공예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할머니들 곁에서 재봉질과 바느질을 따라 했다. 초등학교 무렵에 이미 학교 연극행사의 의상을 다 맡아서 할 정도였으니 취미도 있었고 재능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전공도 이쪽(영남대 의상학과)으로 정해졌는데 운명이었고 그 소명에 후회하지 않는다. 존경하는 디자이너는 샤넬과 알렉산더 맥퀸이다. 샤넬은 1920년대 유럽에서 여성복의 혁신을 이루었고 세계의 트렌드를 좌우했다. 고아였던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지역 사회에 자선사업을 활발히 벌이기도 했다. 특히 사망한 후에도 최고급 브랜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점이 나에겐 가장 부럽고 존경스러운 부분이다. ‘요절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의 그 천재성도 항상 나를 매료 시킨다. 그는 매 시즌 파격적인 시도로 화제를 뿌리며 패션을 예술의 단계로 끌어올렸다.

-연극 의상이나 예술단체와 컬래버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

어릴 적부터 연극과 무대에 관심이 많았다. 학예회 때마다 연출, 기획, 의상, 소품에 대본, 연기까지 도맡아 했다. 대학 4학년 때 극단 ‘처용’의 이상원 대표와 인연이 되어 무대의상을 처음으로 접했다. 이후 대구 소극장에서 20편이 넘는 작품에서 무대의상을 맡았다. 연출가의 의도에 맞추고, 작품 흐름에 일관성을 유지하며, 배우 개개인의 캐릭터를 살리는 작업이 나에겐 너무 흥미로웠다. 어렵지 않은 작품이 없었고, 매 작품마다 의상, 소품을 제작하느라 며칠씩 밤을 새우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내가 ‘성장’한다는 것을 느꼈다. 뮤지컬 ‘미스코리아’ ‘비 내리는 고모령’ ‘반딧불’ ‘라 트라비아타’ 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제27회 대구컬렉션에서 엘바이엘 이유정 대표가 패션쇼가 끝나고 무대 인사를 하고 있다. 엘바이엘 제공

-최근 대구 디자이너들의 활동이 많이 위축되고 있다.

▶얼마 전 박동준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몇 몇 숍이 간판을 내렸다. 이런 지역 패션업계에 침체와 위축이 안타깝다. 한 때 서울보다 컬렉션을 먼저 열며 패션산업을 선도 했었는데.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요즘은 대구 패션산업의 자존심을 지켜야겠다는 사명의식 같은 것이 생긴다.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 옷을 입고, 패션산업을 일구었으니 이제 그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상 디자이너로서 대학 강단에도 섰다는데.

▶10년 넘게 패션디자인 전공 겸임교수를 맡았다. 동아대, 대경대, 선린대에서 강의를 했다. 학생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야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강의 준비를 철저히 했다. 두 가지 일을 그것도 양쪽에 최선을 다하자니 너무 바빴고 힘들었다. 10년쯤 강단에 서니 사업과 강의를 병행하다 자칫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칠 수 있겠다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도 학생들과 함께 도매시장에 원단을 보러 다니며 실습하던 일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코로나 19 때문에 미뤄놓은 일이 많을 것 같다. 앞으로 계획은?

▶일단 코로나 19로부터 빨리 벗어나야겠다. 그래야 닫혔던 해외시장도 열리고 패션쇼, 컬렉션 행사도 열린다. 이런 축제를 기반으로 바이어도 몰려들고 대구 패션의 외연도 확대된다. 코로나 19 전 중동, 미국은 물론 유럽시장까지 진출한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팬데믹 상황이 너무 아쉽다. 코로나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미국, 유럽, 중동, 중국 등지에서 ‘LBYL’ 브랜드가 자리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대구의 섬유, 패션업계도 빨리 코로나 우울을 털어버리고 재도약을 위한 준비에 나서야할 것 같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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