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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피플] ‘김태식양복점’ 대표 김태식 명장

기사승인 2021.04.30  14: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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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천생 양복쟁이... 이 행복 평생 이웃에 전할 터”

‘김태식 테일러’ 김태식 명장이 자신의 양복 철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상갑 기자

“당신은 스스로 자랑스러운 가요? 스스로 물어서 ‘그렇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당신은 최고 명품 정장을 입을 자격이 있다. 그 남자를 위한 옷, 김태식은 바로 ‘그 옷’을 만들고 싶다.”

대구시 중구에서 발행한 ‘100년의 가게, 100년의 미래-김태식 양복점’에 나오는 문구다.

중구 대봉동 한양가든 상가1층 ‘김태식 양복점’엔 벽면을 따라 많은 트로피, 상패,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름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과시·전시용 같지만 하나씩 들여다보노라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대한민국 명장증, 훈장증과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표창 등 고(高) 퀄리티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각종 세계대회에서 받은 트로피와 인증서들까지 더해지면 그 주인공에게 저절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 50년 넘게 ‘김태식 양복점’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태식 대표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보았다.

◆한국 최초로 양복 명장, 철탑산업 훈장=고령 다산에서 태어난 김 대표는 유년기에 대구로 이사 온다. 8남매 중 막내였던 그는 새벽마다 신문배달을 하며 일찍부터 생활 전선에 나섰다.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 서문시장에서 양복점을 하던 사촌형님 집에 심부름을 갔다가 운명처럼 양복점일과 만났다. ‘기왕 이 길로 들어섰으니 이 분야의 최고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타고난 재주와 성실한 품성 덕에 그는 선배들을 제치고 자리를 잡아갔다.

“당시 견습생 꼬리를 떼는데 5~7년이 걸렸는데 저는 2년 만에 뗀 것 같아요. 고참들이 맡는 상의공(上衣工) 자리에 앉았을 때는 너무 설레어서 잠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숯불 아이롱, 연탄 다리미를 밤낮으로 놀리고, 가위를 쥔 손에 굳은 살이 배기를 10년째, 드디어 청년 김태식은 전체 맞춤 공정을 지휘하는 수석 재단사가 되었다.

1984년 그는 ‘김태식 테일러’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간판을 걸고 독립했다. 이미 국제대회에서 숱한 트로피, 상패를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그는 틈날 때마다 끊임없이 기술 개발을 위해 노력한다. 틈틈이 재단, 바느질, 다림질, 재봉 관련 서적을 찾아 탐독하고 소문난 재단사가 있으면 무턱대고 찾아가 배움을 구걸(?)하곤 했다.

“1980년대 서울에 재단, 봉재 최고 기술자가 있었는데 그 분 기술을 위해 배우기 위해 몇 년간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다녔습니다. 처음엔 망설이셨던 그분도 제 열정에 마음 문을 열고 ‘너는 천생 양복쟁이니, 평생 양복을 떠나지 말라’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런 노력 덕에 김태식은 2002년 양복쟁이들의 영원한 로망인 ‘대한민국 양복 명장’에 올랐다. 2013년엔 맞춤양복 기술 발전 공로를 인정받아 철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맞춤양복 분야에서 산업훈장은 그가 처음이었다. 

세계맞춤양복연맹 부회장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김태식 명장. 한국맞춤양복협회 제공

◆아시아양복맞춤축제 성공 개최 이끌어=1979년 양복산업기사 자격증을 딴 그는 본격적으로 국내대회에 출전 하며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기 시작했다. 1980년 전국양복기술자 160명이 참가한 전국양복맞춤기능경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며 전국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그 후 1983년에 이용화제도상 ‘펭귄상’을 1983년엔 ‘봉황상’을 받으며 국내 최고 기술을 인정받았다.

김 명장이 2002년 11월에 받은 명장증서는 우리나라에서 양복재단 및 재봉기술 분야에서 첫 번째였다. 국가에서 법으로 정한 최고의 경지에 오른 그지만 항상 자만심과 나태함을 멀리하고 늘 깨어 있으려 노력한다.

김 명장은 지금도 국내외 대회에 출전하며 자신을 독려하고 있다. 2005년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세계주문양복회원들을 상대로 자신의 기술을 소개했고, 2006년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열린 아시아마스터스 재단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16년 7월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주문양복연맹총회 국제재단경연에서도 금메달을 따냈다.

평생을 기능인으로, 기술 명인으로 살아온 그지만 몇 번 기관의 수장을 맡아본 외도(?) 경력도 있다.

김 명장은 2018년 제 25대 한국맞춤양복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엔 아시아맞춤양복연맹총회가 예정되어 있어서 어느 때보다 소중한 해였다. 당시 7월 30일부터 5박6일 동안 세계 11개국에서 350여명의 테일러들을 불러 모아 국제대회를 치렀다. 김 명장은 당시 행사를 통해 대구를 국제적인 섬유 도시로서의 위상을 다져나갔다.

그는 “당시 아시아 맞춤양복 축제를 양복업계 집안 잔치로 끝내지 않고 행사에 파이를 키우기 위해 지역 섬유, 패션인들에게 문호를 개방 했다”며 “덕분에 맞춤양복 홍보와 더불어 섬유도시 대구를 동시에 알리는 시너지 효과를 거두었다”고 말한다.

협회장 시절 아쉬운 기억도 있다. 2018년 아시아맞춤양복연맹총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2021년 세계맞춤연맹총회 대구 개최를 진행했다가 아쉽게 패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일본과 대회 개최를 놓고 끝까지 경합하다가 한 표 차로 패해 아쉬움을 남겼다. 

아시아주문양복연맹 패션쇼 입장식 모습. 한국맞춤양복협회 제공

◆재소자 찾아 재능기부, 후진 양성도=국제행사의 유치, 성공적 개최 외 김 명장의 또 하나의 공적은 후진 양성과 소외된 이웃을 위한 재능기부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기능올림픽에 나가지 못했던 김 명장은 그 아쉬움과 열정을 후진양성을 위해 쏟고 있다. 이제까지 그에게 기술을 전수받은 제자들이 국내외 각종 경진대회에서 따낸 매달 수만 무려 47개에 달한다.

그는 이미 일찍부터 양복기술 재능기부에도 앞장서왔다. 그의 기부는 주로 소외된 곳에서 이루어 졌다. 지금도 30년 넘게 대구교도소 재소자들을 찾아가고 있다. 바쁜 업무 속에서 먼 거리를 오가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누군가 원하는 것을 함께 나눌 수 있어 이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는 “그동안 나에게 양복 기술을 배우는 재소자가 출소 후에 새 삶을 찾은 사례가 적지 않다”며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감사 인사를 전하러 찾아오는 재소자들이 가끔 있다”고 말한다.

김 명장은 ‘양복 기술을 배운 덕에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며 ‘평생 양복쟁이로 남아 이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저작권자 © 디지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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