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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목, 이 기업] 170년 역사 자랑, 성주군 성동정미소

기사승인 2021.03.04  10:5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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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레방아-동력 방아-현대식 정미소, 170년 역사 “문화재로 지정해야”

박수연 대표가 성동정미소 앞에서 정미소의 역사와 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상갑 기자

선사시대 방아연장에는 돌공이, 돌확, 갈판, 갈돌이 있었다. 주로 인력으로 행해지던 탈곡(脫穀)은 인류의 지력(智力)이 발달함에 따라 동물이나 자연의 힘으로 대체 되게 되었다. 전자가 연자방아이고, 후자는 물레방아, 풍차 같은 것들이다.

전기와 기관 동력이 발견되면서 이제 타작은 정미소, 방앗간처럼 기계들의 작업이 되었다.

성주군 수륜면에 가면 약 17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성동정미소가 있다. 수륜중학교 바로 옆에 위치한 이 정미소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정미소의 비밀은 수력(水力) 물레방아, 발동기 물레방아부터 현대식 정미소에 이르는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물레방아의 낭만부터 발동기의 추억에 현대 정미소의 화려함까지 갖춘 성주군 성동정미소로 떠나 보자.

◆조선 후기 물레방앗간이 정미소로=현재 성동정미소가 수륜면에서 방앗간을 연 역사는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가천을 끼고 있는 수륜면은 일찍부터 충적평야가 발달해 미곡 생산의 중심지였다. 조선 후기 대가천변에는 평야를 따라 여러 곳의 물레방앗간이 있었는데 성동정미소는 그중 하나였다.

현재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는 박수연 씨는 “자신의 친정아버지가 1950년 무렵 이 방앗간을 인수해 발동기 물레방아로 개조했는데, 그 물레방아는 이미 3대를 거쳐 온 족보(?) 있는 방앗간이었다”고 말한다.

솜씨 좋은 친정아버지는 20마력 발동기를 설치해 물레방아를 돌렸다. 사실 이때부터가 성동정미소의 출발이었다. 친정아버지는 방앗간 발동기 수리, 제작 기술이 뛰어나 인근에서 기계가 고장 나면 원정 수리를 다닐 정도로 솜씨를 인정받았다.

이후 성주군에 전기가 들어오자 친정아버지는 성동정미소를 현대식 정미소로 개축했다. 1960~70년대 성동정미소는 전성기를 구가했다고 한다. 박수연 씨는 당시 “성주군에서 우리 집이 현찰이 제일 많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며 “그 당시에는 콧대가 높아 웬만한 남자, 혼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다 10여 년 전 선친 박두준 씨가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현재는 박수연씨가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70년간 유기농, 자연 건조 토종밀 고집=성동정미소의 주력상품은 토종밀 제분이다. 수입 밀이 99% 이상을 차지하는 현실에서 다소 무모한 영업 전략이지만 박 대표는 선친이 평생을 지켜온 우리 밀에 대한 애정을 저버릴 수가 없다고 말한다.

‘앉은뱅이밀’로 불리는 토종밀은 재배, 건조, 제분에서 가격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순탄한 과정이 없다. 현재 이곳에서 판매되는 우리밀가루는 2.5kg 1만원이다. 마트에 가면 5,000원이면 같은 중량을 사고도 남는다. 거기에 누리끼리한 색깔에 거친 입맛까지 무엇 하나 소비자들을 만족시켜주는 구석이 없다.

가격만 비싼 게 아니라 성동정미소의 곡물 수매는 까다롭기로 소문이 났다. 정해진 종자로 파종을 하고 농약을 쳐서는 안되며, 반드시 햇빛 건조를 해야 한다. 자연 건조방식은 선친이 70년 동안 이어온 고집으로 계약재배 제1 수칙이다. 덕분에 성동정미소에서 나온 미곡은 밥만 먹어도 맛있다는 소문이 났다. 정미소에서 수매되는 밀은 고령, 김천, 현풍 등지에서 전량 계약재배로 경작된다.

까탈스러운 계약조건에 까다로운 도정, 탈곡, 제분까지 만족시키다 보니 단가는 올라가고, 비용이 올라가니 가격경쟁력은 떨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있는 것이다. 그래도 전국에서 성동정미소 토종밀의 진가를 알아주는 3천~4천명의 단골들이 정미소를 떠받치고 있어 이들 덕분에 그나마 사업이 굴러간다. 토종밀 만으로는 정미소 경영이 안돼 보리, 벼도 함께 수매하고 있다.

성동정미소의 내부 모습.

◆정미소 보전에 정부, 자치단체가 나서야=작년에 박 대표는 우리밀 15톤, 보리 15톤을 수확했다. 예년에 20톤 밑으로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어 격세지감을 실감한다. 토종 밀과 이곳 정미소 쌀만 주문해서 드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분들이 하나씩 돌아가시면서 주문 양이 점점 줄어 들고있는 것이다. 수입밀의 입맛과 대형마트 편의성의 길들여진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을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마을마다 하나씩 남아 있는 정미소들도 이제 사양화를 넘어서 존폐의 위기에 몰려 있다. 이미 자치단체마다 미곡처리장(RPC)과 벼건조장(DSC)이 들어서 대부분의 벼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트랙터에 의해 수확된 벼는 RPC로 반입돼 선별, 계량, 품질검사, 건조, 저장, 도정을 거쳐 출하까지 원스톱으로 처리한다.

“얼마 전에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치인이 일부러 우리 정미소를 찾아오셨어요. 그분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전국의 정미소들이 무방비로 헐리고 있어 안타깝다”며 “자치단체에서 근대건축 자산에 대해 군(郡)지정문화재나 등록문화재 지정을 검토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정미소는 박 대표에게 선친의 손때가 묻은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성주의 역사가 서려 있는 소중한 근대 건축물이다. 지붕과 천장이 갈수록 노후화돼 계속 손을 봐야 하지만 지금의 수익 구조로는 엄두도 못내는 실정이다.

“문화재 지정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제가 살아서 운영하는 동안만이라도 지역민들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어르신들에게 정미소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유지, 보수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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