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소비생활 생활/레저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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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 전통 시장 역사와 관련해 낙동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로, 교량이 미흡했던 시절 대부분의 물자 수송은 물길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대구 고대사에서 문명의 전파, 이동 경로를 조사할 때도 낙동강은 늘 중심에 있었다. 4~5세기 조성된 불로동고분군에서는 남해에서 올라온 상어, 고래 고기, 정어리 등 해산물 흔적이 발견됐다. 고대에 이미 대구와 부산을 연결하는 수상 네트워크가 존재했었다는 증거다.1993년 북구 팔달동고분군에서 발견된 납작도끼(板狀鐵斧)도 강을 통한 문명 교류를 밝히는데 획기적인 단서다
한 분야에서 35년? 단순 계산으로 1만2천일이 넘고, 시간으로 환산하면 3만 시간이 넘는 기간을 어느 한 분야에서 일했다는 것인데.... 눈 감고도 작업의 일머리를 연산(演算)하고, 보지 않고도 전 공정을 훤히 꿰는 차원일 것이다.강산을 세 번 반이나 바꿔 가며 대구 출판계에서 한길을 걸어온 학이사(學而思) 신중현 대표가 책을 펴냈다. ‘다시, 지역출판이다’다. 지역 출판을 화두로 30년 넘게 현장에서 일 하면서 느낀 소회를 담았다.1987년 출판사에 첫발을 내딛은 당시 출판 상황과 대구에서 출판일을 하면서 느꼈던 생각과 바람,
왜관(倭館)? 일본인들의 공관? 경북 칠곡군 왜관을 떠올리면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있다.반일(反日) 정서가 강한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지명이 존속할 수 있었을까.(삼천포나 이리처럼 지명을 바꿔 달라고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할 만도하다) 여기에는 왜관이란 지명을 거리낌 없이 수용한 지역민들의 정서가 전제되었을 것이다.무얼까? 왜색이 짙은 지명이 지역에서 뿌리를 내린 이유. 그것은 아마 조선 후기부터 칠곡에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 새상품, 신문물에 대한 주민들의 저항이 없었고, 또 경북 내륙 소도시가 낙동강을 통해 해외로 통하는 것을 환영했